그(입문자)는 전에 다른 법문으로 수행했기 때문이죠. 누가 스승이었는진 말하지 않더군요. 허나 수행이 특정 등급에 이르자 이런 강연도 할 수 있었어요. 영감을 주는 말들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죠. 내면으로 영적인 연결이 있는 것처럼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하는 듯했고 그는 그냥 그 메시지를 전할 뿐이었어요. 그런 능력이 있었는데 얼마 뒤에 갑자기 그런 영적 능력을 잃었고 연결이 막혔어요. 허나 계속 설법을 했죠. 그가 영적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계속 그를 믿었고 신뢰했고 설법을 계속 들었어요. 나중에 그는 생각했죠. 『안 돼, 이건 속이는 거야. 영적 능력이 있었지만 이젠 없잖아. 계속할 순 없어』 그래서 관뒀죠. 다신 그럴 엄두가 안 났대요. 옳지 않다고 생각돼서요. 그런 뒤 다른 길을 찾는 영적 수행을 계속했어요. 그러다가 날 만났고요.
그는 전에 사람들을 속인 걸 후회하고 있어요. 속일 의도는 없었죠. 그런 행위가 업을 초래하는지 묻길래 난 아니라고 했죠. 『그때는 그렇게 알았고 속일 의도는 없었잖아요.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알았던 순간 멈췄으니 괜찮아요』 그래서 그는 돌아가 그들을 구하고 옳은 길로 이끌겠다는 서원을 했죠. 전에 하던 건 삿된 길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몰랐던 거죠. 그러니 누구나 희망이 있어요. 어디서 왔는지는 상관없죠. 중요한 것은 단순한 마음을 유지하는 거예요. 교만해지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언제든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세요. 그러면 아무것도 여러분을 막지 못할 거예요.
내가 간혹 말했거나, 여러분이 들어봤겠지만, 전에 다른 방법으로 수행했다면 이 법문을 시작할 때 어려움을 겪을 거예요. 또는 너무 박식하다면, 예로 고학력자라면, 영적 수행을 할 때 장애가 더 많을 수 있어요. 혹은 육조 혜능처럼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다소 둔한 사람들만이 성불할 수 있다거나 영적 수행에서 빠르게 진보할 수 있단 말을 듣기도 하죠. 허나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그런 일이 있긴 했죠. 허나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건 아녜요. 다 그런 건 아닐 수 있죠. 방금 해준 얘기처럼요. 알다시피 그는 여러 방법으로 수행했었고 소위 깨달은 스승들을 많이 만났으며 어떤 경지에 올라서 볼 수 있는 능력이… 때로는 다른 수행법으로 수행해도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기도 해요. 그런 경우가 있죠. 그건 뭔가 성취했으며 그 수행의 길에서 성공했다는 걸 뜻해요.
우리 단체에도 비슷한 배경의 입문자들이 있죠. 그들은 호흡법을 수행해서 숨을 안 쉴 수도 있어요. 『거북』 『귀식대법』이라 하죠. 정말이에요. 『귀식』의 경지라 하는데 숨을 안 쉰다는 거죠. 물속에 잠겨 있어도 죽지 않아요. 숨을 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귀식』의 경지라고 부르는 거죠. 상당히 높은 경지예요. 그래요. 그걸 모르나요? 웃지 마세요. 농담 아녜요. 나도 전에 배운 적 있어서 알아요. (숨을 쉬지 않고 『거북』처럼 되는 거요) 요즘에는 이런 방법을 가르치는 소위 불교 스승이나 교사들이 많아요. 숨을 쉬지 않는 것을 『귀식』의 경지라 하는데 비범한 거죠.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에게 5분간 숨 쉬지 말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요? 못하죠. 그건 그가 비범했단 뜻이죠. 허나 그래도 나중에 내게 배우러 왔어요. 그건 그가 이미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걸 뜻해요.
따라서, 영적 수행자가 더 빨리 진보하는 것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우리에게 달린 거죠. 우리가 진정으로 신실하고 겸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능해요. 어디에서 시작하든 결국엔 그곳에 도달할 거예요. 만일 우리가 수행해서 작은 성취를 이뤘는데 자만하거나 자기만족에 빠져, 그 작은 성취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서 끝이겠죠. 곧바로 퇴보할 거예요. 진보가 멈추는 데 그치지 않고 등급이 떨어지죠. 왜일까요? 왜냐하면 때로… 법칙이 그래요. 최고점에 도달한 것은 필연적으로 하강하게 마련이죠. 그 정점을 뛰어넘지 않으면요. 예로, 선불교에서는 정상에 오른 뒤에… (최고점에 도달한 뒤에요) 최고점에 도달한 뒤에… 그런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고 하죠. (그럼 공이 있는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거예요.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 대나무 장대에 매달려 있으면요. 결국 내려와야 해요. 그 대나무 장대를 붙들고 있느라 지치겠죠. 지치지 않겠어요? 나중에 다시 내려와야 하죠. 배고픈 채로요.
어떤 수준에 도달해서 모든 것을 얻었고 모든 것, 배워야 할 모든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린 바로 추락하게 될 거예요. 우리 입문자 중 일부도 그래요. 그래도 난 그들을 돕죠. 안 돕는 게 아녜요. 하지만 그 사람 스스로 교훈을 배우고 교만함을 버려야 해요.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모든 걸 다 배웠다고 생각하니까요.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운 거예요. 밖에 나가면 시험에 빠져, 해서는 안 될 어떤 걸 갑자기 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그도 딱하죠. 애석한 일이에요. 예를 들어, 예전이라면 보통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한데 그는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나를 조용히 떠났어요. 그런데 나가자마자 문제가 생겼죠. 곧바로 문제가 생겼어요. 예들 들어, 사랑이나 명예, 돈 문제에 갇힌 거예요.
알다시피, 보통 오계에서 금하는 것들이 있는데… 예로 『간음』을 해서는 안 되죠. 원래 일반인들도 해선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수행자들은 더더욱 안 되죠. 허나 자신이 대단하고 모든 걸 잘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계율을 어기게 될 거예요. 그는 그걸 분명히 알면서도 제어할 수 없게 돼요. 그의 교만함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죠. 그건 다른 말로 하면, 그 모든 것, 우리를 보호하는 최고의 보호력 전부를 거부한다는 의미죠. 스스로 충분히 훌륭하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럼 당연히 이렇게 말하겠죠. 『됐어, 남들을 보호하러 가야겠어』 여러분은 자기 일을 하고 우린 우리 일을 하는 거죠. 여러분은 우리가 필요 없다 여기고 떠날 거예요. 그러면 악마가 즉시 잡으러 올 거예요.
악마는 누구일까요? 그 또한 일종의 시험이죠. 우주가 그들을 창조했죠. 우리를 훈련시키고 의지력을 단련시키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그런 사고방식에 속는지 보려고요. 만일 자신이 대단하고 이미 최고 경지에 올랐으며, 모든 걸 배웠다고 생각한다면 즉시 시험받을 거예요. 정말로 모든 걸 배웠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그러면 알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그냥 일어나서 『나는 모든 것을 배웠다. 나는 부처다』라 말하는데 아무도 그를 시험하지 않고 아무도 그에게 스스로를 가늠할 상황을 주지 않으면 그 자신조차 모를 테니까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렇지 않나요? (맞습니다) 그렇죠. 영적 수행을 할 때, 때로 성취감을 느끼거나 『도를 얻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그런 느낌은 착각이에요. 득도했다고 느낀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거예요. 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여전히 있다면 아직 얻지 못한 거죠. 타인이 득도했다고 말하거나, 우리 자신이 득도했다고 말하려면 영적인 체험에 근거해야 해요. 자신이 득도했다고 느끼거나, 우리의 교만이 우리 자신을 현혹시켜 득도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과는 달라요.
깨달은 스승이 때때로 자신의 등급을 드러내는 것은, 제자들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말하는 거예요. 이를 테면요. 혹은 제자들이 내적으로 너무 많은 체험들을 해서 스승의 등급을 숨길 수 없게 되기도 하죠. 예를 들면 그래요. 스승은 속일 수 없기에 진실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죠. 모두가 참고할 수 있게요. 그건 달라요. 그럴 땐 3인칭으로 말하죠. 예로 난 여러분에게 깨달은 스승들은 종종 이것저것을 한다고 말해요. 혹은 스승은 종종 이것저것을 한다고 말하죠. 1인칭으로 나라고 하지 않고 『스승』이라고 하죠. 1인칭? (시점, 1인칭 시점입니다) 그래요. 1인칭 시점이 아니죠. 난 객관적으로 말해요. 마치 어떤 이를 거기에 놓고 여러분과 내가 그를 언급하는 것과 같아요. (3인칭입니다) 3인칭이죠. 깨달은 스승이 되려면 때로 그렇게 하는 걸 피할 수 없거든요. 스승 자신은 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조금의 교만함도 없어요.
사실, 깨달은 스승은 가장 겸손한 존재예요. 스승은 남들이 견딜 수 없는 걸 견디고, 남들이 거부하는 일을 해요.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죠.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인 체험이에요. 그가 누더기를 입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게 아녜요. 꼭 그런 건 아니죠. 가령 어떤 거지들이나 탁발하는 이들은 별로 겸손하지 않아요.
겸손과 열등감은 다른 거예요. 또한 겸손과 자신을 낮추는 척하는 것도 다른 것이죠. 아니면 겸손과… 때로 남을 기분 좋게 하려고 자신을 낮추거나 아부하거나 남을 추켜세우거나 고의로 자신을 낮추는 것도 다른 거죠. 겸손이란 그가 겸손하다는 걸 남들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도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처럼 그냥 자연스럽죠. 그러다 때로 어떤 일이 생기면 비로소 우리는 그걸 알아차리게 되죠. 혹은 그가 갑자기 몇 차례 그걸 인정하게 되죠. 『아! 겸손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거예요. 그 자신은 이런 생각 안 해요. 『오, 난 참 겸손해. 아!』 『보세요. 난 참 겸손해요』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르죠.
좋아요, 이런 진지한 얘기는 더는 못하겠네요. 내면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다른 이야기도 하나 해줄게요. 원래는 얘기할 생각이 없었는데 너무 말이 많았네요. 그래도 괜찮죠. 그렇죠? 피곤한가요? (아니요) 더워요? (덥지 않습니다) 좋아요. 가끔 햇볕을 쬐는 것도 좋아요. 그렇죠? (네) 그래요.
또 다른 얘기를 해줄게요. 마치 화신이 있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안 그래요. 명확히 구분해야 해요. 수십억 화신처럼 스승의 화신이 있고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이 있어요. 죽은 영혼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데, 종종 나쁜 일을 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하죠. 대개는 도움이 되거나 좋은 일을 하지 않아요. 진정한 화신은 스승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종종 우리의 영적 수행을 돕고, 우리가 재난을 겪거나 고통받을 때 우리를 도와주죠. 화신은 종종 좋은 일을 하고 우리를 돕고 축복해주죠. 그런 화신을 보면 우리는 행복하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게 될 거예요. 놀라운 지복을 느끼죠. 이건 달라요. 화신은 우리를 가르치고 보호하기 위해 나타나요. 이는 내면의 스승이에요.
또 다른 종류는, 고인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죠. 억울하게 죽었거나 갑자기 죽게 돼서 평화롭지 못하게 죽었거나 자연사하지 못한 망자들이 있죠. (네) (그들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요? 꼭 그런 건 아녜요. 그게 바로 그들의 때인 거예요…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아요. 다만 그가 죽는 것을 꺼리는 거죠. 그래서 그에게는 마치… (때 이른 죽음이요) 아직 때가 안 됐다고 여기죠. 혹은 흑마술이나 백마술을 행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사후에도 여전히 남아서 고립된 채 떠돌아다니기도 해요… 그런 상태를 『갈 곳 없는 상태』라고 하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거죠. 혹은 밀교에서는 이를 『중간 상태』라고 해요.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다른 세상에도 아직 속하지 않은 상태가 되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유령처럼 떠도는 거예요. 때로 우리는 마귀를 본다고 말하는데, 바로 그들이죠… (떠도는 유령이요) 아직 해탈하지 못한 떠도는 유령들이요. 그들은 이 세상에 매달려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어요. 이건 매우 괴로운 상황이죠. 허나 그들은 신통력이 있어 순식간에 아주 멀리도 갈 수 있어요.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와요. 그러니 그들을 생각하지 않는 게 상책이죠.
사진: 『안녕, 멋진 친구 여러분 다시 만나 반가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