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현재의 알제리인 히포에서 존경받는 그리스도교 주교였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 중 한 분이며, 아직도 보존된 백 권의 책과 3백 개의 서신, 5백 개 강론을 집필한 다작의 작가였지요.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신국론』 『그리스도교 교양』 『고백론』이 있습니다. 존경받은 이 주교는 또한 자비로운 채식인이었고, 『고기와 술뿐 아니라 너무 맛있는 다른 진수성찬도 먹지 않는』 이들의 삶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성 바울의 말을 인용했지요. 『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며, 형제자매를 타락시키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늘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신국론』에서 존재의 보편적인 선물에 대한 통찰을 소개합니다. 이것 자체는 우리에게 어떤 생명체도 다른 것과 바꾸지 않을 깨달음을 줍니다. 또한 어떻게 신 안에서 모든 생명체가 자신에 대한 보다 나은 지식을 찾는지도 알게 합니다.
제 11권 27장: 존재 및 인식과 이 두 가지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어떤 자연의 마법에 따른 것이며 즐거운 것이기에, 불쌍한 사람조차 다른 이유 없이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비참하다고 느낄 때, 자신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자신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실제 상황도 모두 완전히 비참하고, 그렇게 여겨지는 사람들조차 그렇다. 지혜로운 자들의 어리석음뿐 아니라 스스로 복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가난하고 궁핍하기 때문에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만약 누군가가 그들에게 불멸을 주려고 하면 그들의 불행도 영속해야 함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 대안을 제시해야 해도, 만약 같은 불행 속에서 영원히 존재에서 퇴보하고 소멸하거나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떤 조건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런 상태에서라도 항상 존재하는 것을 즐겁게, 아니 크게 기뻐하며 즉시 선택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흔히 보이는 감정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죽음으로 불행을 끝내기보다는 차라리 그런 불행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을 볼 때, 자연이 얼마나 소멸하는 걸 꺼리는지 명백하지 않는가? 따라서 죽어야 함을 알게 되면, 이 자비를 베풀어 같은 고통 속에서 좀 더 오래 살 수 있고, 죽음에 의해 고통을 끝내는 것을 미루는 걸 큰 은혜로 생각한다. 그래서 불멸이 자신에게 무한한 파멸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지 명백하게 증명된다. 이런! 그런 계산을 모르는 모든 동물, 거대한 용에서부터 가장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존재하기를 원하며, 전력을 다해 죽음을 피하는 걸 원한다고 증명하지 않는가?
아니, 우리가 볼 수 있는 움직임으로 파괴를 피할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이 없는 식물과 관목들은 더욱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빨아들여, 하늘을 향해 건강한 가지를 뻗으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보존하려 하지 않는가? 미세하게 보면 감각은커녕 배아적 생명조차 전혀 없는 존재들 역시 상공을 찾거나, 깊이 가라앉거나, 중간지점에서 균형을 이루게 되어 그 본성에 가장 부합하여, 존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그 존재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속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이 사실로부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광기에 기뻐하기보다 제정신으로 슬퍼하길 더 좋아한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멋진 본능은 모든 동물 중에 인간만의 것이다. 어떤 동물은 이 세상의 빛에 대해 우리보다 더 예리한 시력을 가졌어도, 우리의 마음에 비추는 그 영적인 빛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만물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이 빛을 받는 능력이 커질수록 우리의 판단능력도 향상된다. 그런데 동물도 지식과 유사한 것을 확실히 가졌다. 반면에 다른 물질적인 것들은 감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감각의 대상이기에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식물 전부는, 발육과 생식이 감각적인 생명과 유사하다. 하지만 식물과 모든 물질적인 것은 그들의 본성에 숨겨진 원인이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이 가시적인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그들 외형은 우리의 감각에 의해 인식되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지식 욕구를 보상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관념으로 판단하지 않으면서, 신체적 감각을 통해 그들을 인식한다. 우리는 인간 내면에 속한 또 하나의 훨씬 우월한 감각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의로움과 불의를 인식하는데, 그것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의로움으로, 그런 이해의 결핍을 불의로 인식한다. 이런 감각은 시력의 도움을 받지 않으며, 귓구멍이나 코의 콧구멍, 입의 미각이나 몸의 촉각에 도움을 받지 않는다. 그것에 의해 나는 내가 존재함과, 내가 이것을 알고 있음을 확신한다. 이 두 가지(존재와 지식)을 사랑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내가 그들을 사랑함을 확신한다.
제 11권 29장: 거룩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신성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창조주의 피조물에서 창조된 원인을 보고, 예술가의 작품 속에서 그들을 보기 전에 알게 되는 지식. 저 거룩한 천사들은 듣는 말이 아니라 변치 않는 진리의 영혼의 현존에 의해 즉, 하나님 말씀의 독생자에 의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이 말씀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 그들의 성령을 알게 되고, 이 삼위일체는 분리될 수 없고, 성 삼위는 하나의 본질이며,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임을 안다. 그들은 이것을 알기에 우리보다 그들이 이것을 더 잘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피조물을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마치 창조된 솜씨를 통해 알듯이 더 나은 방식으로 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 안에서보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더 잘 안다. 비록 자신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창조되었고, 그들의 창조주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한낮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앞선 설명에 의하면 그들 안에는 어스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설계에서 어떤 것을 그것이 만들어진 성질로 아는 것과, 그 자체로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의 곧은 정도와 수치의 정확도는 정신으로 상상하거나 종이에 기술되어 알게 되듯이, 정의는 불변의 진리를 통해 알기도 하고, 올바른 인간의 정신을 통해 알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