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욕망
『지적인 사랑, 즉 마음의 욕망 또한 존재한다. 활동적인 지능인 마음은 알다시피 목적을 세우고 열망할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은 마음의 이상이다. 마음은 그 이상을 대상화하고 실현하려고 한다. 조각가가 자신의 마음속 이상을 객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조각상을 만드는 것과 같다.
지적인 사랑은 육체적 사랑보다 훨씬 위대하다. 그 이상은 훨씬 다양하다. 각각의 이런 지적 이상은 부분적으로 지적 사랑을 충족시키지만 여전히 더 위대한 것을 창조하기 위한 사랑을 밀어붙여 지적 만족을 높인다. 그런데 육체적 사랑은 너무 자주 탐닉하면 질릴 수도 있지만, 지적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주는 즐거움은 계속 커진다.
인간의 지적 본성의 이상은 지식과 성취이다. 지성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누리는 사랑과 만족에는 상관없으며, 정상 상태가 되려면 이러한 이상들과 결합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가장 높은 본성인 영성을 생각하며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존재의 영적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랑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단지 그것이 개인을 넘어서며 더 큰 자아에 작용하기 때문일까?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더 높고 더 고귀한 목표를 가진 욕망이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의 영적 본성을 만족하려는 욕구이다.
위대한 신플라톤학파 철학자이자 신비주의를 설명한 플로티노스는 말하길 『사랑은 만물을 아름다움으로 이끈다』 각기 다른 사랑은 인간 존재의 위계에서 서로 다른 단계에 속한다. 영적 사랑은 선을 갈망하는 영혼의 활동이며, 한 신비주의자는 소위 영적 사랑이 그 높은 감각에 즐거움을 원하는 영혼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신의 사랑은 신의 아름다움을 관조한다』가 수피 신비주의의 금언이다. 인간의 가장 높은 욕망인 영적 사랑은 우주적 조화나 본성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경험하려는 내적 충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육체적 사랑이 몸에 기쁨을 주듯이 그런 환희가 영혼을 만족시킨다. 인간의 사랑 중에 가치가 없거나 금해야 할 사랑은 없다.
각각의 사랑, 즉 육체와 마음, 영혼의 사랑은 각각의 본성과 결합해야 한다. 이것이 신비적인 삼위일체의 결합, 인간의 세 가지 본성의 결합이다. 인간이 지적 사랑이나 영적 사랑을 잊고 육체적 사랑을 위해 그것을 소홀히 할 때 그 결과는 타락과 불행이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신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한 사랑이어야 하며… 일반적 사랑에 내재한 어떤 결함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신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하며 두려움, 불안, 증오 등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다시 말해 신의 사랑은 끝없는 사랑이며, 줄어들지 않는 성질이 있다.
이는 훔칠 수 없고 질투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육체적 사랑에 수반되는 감정에서 자유로운 사랑이다. 『신을 향한 마음의 이 지적인 사랑은 신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이다. 신을 향한 마음의 이 지적인 사랑은 신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여기서 신의 사랑이 인간의 영혼에 신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신성에 흡수되려는 욕망으로 나타남을 보게 된다. 이는 양쪽으로 늘어난 고무줄과 같다. 고무줄의 두 끝은 다른 쪽 끝을 더 많이 당길수록 가운데로 더 돌아가려고 한다.
수피 신비가 할라지는 말했다. 『창조 이전에 신은 절대적 합일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셨다. 사랑을 통해 신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셨다. 그리고 홀로 이원성이 없는 사랑을 보길 원하셨다. 신은 자신 형상의 비존재에서 외적인 대상을 만들어서 신의 모든 속성을 부여하셨다. 그 형상이 인간이다』
요컨대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도 실제로 축소된 신의 사랑임을 의미한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실제 대상만큼 실체가 아닌 것과 같다.
플라티노스와 플라톤은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신을 향한 사랑의 여정에서 타당한 첫 단계라고 말한다. 육체는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을 사랑해야만 그 본성과 행복하게 결합하며, 건강하고 정상 상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성취할 때 여정의 두 번째 단계인 지적 아름다움인 지식에 대한 사랑이 온다.
정신적 혹은 지적 만족을 성취할 때 인간은 더 큰 사랑, 신성한 아름다움과 세상의 영적인 것에 대한 사랑을 준비한다. 그러니 하나의 사랑이 아닌 단계가 있는 사랑이다. 각각의 진정한 가치는 그 이상에 의해 결정된다. 그 이상에 한계가 많을수록 그 아름다움과 사랑이 줄어든다.
장미십자회는 사랑을 어떻게 말할까? 장미십자회 관점에서 사랑에는 이성적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그들은 사랑이 지적인 경험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사랑의 목표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지속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첫째, 기본적으로 모든 사랑은 욕망이라고 한다. 그것은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에 대한 갈망이나 선호이다.
아무도 고통과 괴로움, 불행, 고뇌를 가져오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결론으로 장미십자회는 사랑이 조화에 대한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직 육체적 감각에만 조화로운 사랑은 다른 두 사랑을 충족하지 못한다. 지적인 사랑의 이상을 성취하는 것은 경시될 것이다. 감정적 자아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그것을 두려움으로 조각 내고 잊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육체적 감각에만 조화를 가져오는 사랑에 집중한다면 정신적 감정을 표현하는 영적 자아의 사랑 또한 결핍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면, 즉 존재 전체의 조화를 경험해야만 절대적인 사랑과 완전한 만족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절대적 사랑은 육체적 건강과 이를 유지하려는 욕구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또한 마음의 창조적인 힘을 사용하는 사랑과 자비, 자기희생 같은 영적 가치를 표현하는 사랑으로 구성된다. 이들 세 가지 사랑의 결합이 장미십자회의 위대한 이상인 깊은 평화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