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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론: 마지막 심판 - 성 아우구스티누스(채식인), 2부 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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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현재의 알제리인 히포에서 존경받는 그리스도교 주교였습니다. 40대 초에 고대 항구도시 히포의 주교가 되었고, 여생 동안 주교직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기독교 철학자 중 한 분이며, 아직도 보존된 백 권의 책과 3백 개의 서신 5백 개 강론을 집필한 다작의 작가로, 신학, 철학, 사회학 등의 주제를 다룬 저술은 기독교계에 지속해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신국론』 『그리스도교 교양』 『고백론』이 있습니다.

존경받은 이 주교는 또한 자비로운 채식인이었고, 『고기와 술뿐 아니라 너무 맛있는 다른 진수성찬도 먹지 않는』 이들의 삶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성 바울의 말을 인용했지요. 『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며, 형제자매를 타락시키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제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 『신국론』 19권에서 미덕의 세속적 측면과 천상의 측면을 논의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평화와 행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5장: 진정한 종교가 없는 곳에는 진정한 덕도 없다

비록 영혼이 육체를 훌륭하게 다스리고 악을 판단하듯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라고 명하신 대로 영혼과 이성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육신과 악에 대한 지배력을 얻지 못한다. 육신과 악의 어떤 주인이 진정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가장 사악한 악마의 타락한 영향에 잘못 이용당하는 마음을 가질까?

이러한 이유로 자신이 소유한 것처럼 보이는 미덕으로 육체와 악이 바라는 것을 얻고 지키는 것을 억누르더라도,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는 한 그것은 미덕이기보다 차라리 악이다. 비록 어떤 이가 단지 자신에게만 관련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 바랐던 미덕을 진실하고 참된 미덕으로 여기더라도 사실 그들은 자부심으로 부풀어 있으며, 따라서 미덕보다는 악으로 간주해야 한다.

육체에 생명을 주는 것은 육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온 것이므로, 인간에게 복된 삶을 부여하는 것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것에서 온다. 내가 인간은 모든 천상의 힘과 미덕이라고 말한 것은 진실이다.

26장: 하나님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와 하나님의 백성이 순례의 시기에 만든 평화의 사용

그러므로 육체의 생명이 곧 영혼이며 인간의 복된 삶은 하나님이시니, 히브리인 성서에서 말하길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따라서 하나님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비참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조차 자신만의 평화가 있으니 그것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죽을 땐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데, 죽기 전까지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생에서 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두 도시가 하나로 뒤섞여 있는 한 우리도 바빌론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바빌론에서 온 하나님의 백성은 너무도 자유로워서 그동안 그들과 함께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교회에 권한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옛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고, 그들에게 바빌론에 순종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섬기라는 신성한 명령을 내릴 때,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바빌론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했다. 이는 선한 자와 악한 자가 함께 누리는 세속적인 평화이다.

27장: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평화는 이 인간의 삶 속에서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이 특별한 평화는 신앙으로 하나님과 함께 누리며, 앞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생에서 누리는 평화는 모두가 누리는 평화이든 우리의 특별한 평화이든, 적극적으로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에 대한 위로이다.

우리의 의로움 또한 비록 진정한 선을 존중하는 한 그것은 사실이지만, 이생에서는 미덕을 완성하는 것보다 죄의 사면을 이루는 그런 종류에 속한다.

하나님의 온 도성이 순례하며 기도하는 걸 보고 그 성도가 외치는 기도가 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이 기도는 『행함이 없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효과적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따르더라도 아직 『타락하기 쉬운 육체에 억눌려 있고』 인간의 몸으로 존재하는 한 악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이 없기에, 의인에게 이 기도가 필요하다. 비록 그 지배력이 있더라도 악은 투쟁 없이 굴복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 투쟁을 잘 유지하고 철저히 이 적들을 제압했더라도 어떤 악이 숨어들며, 행동으로 그걸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한다면 입으로 빠져나가거나 스스로 생각에 스며들게 된다. 그러므로 악과 전쟁하는 한 그의 평화는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저항하는 자와 벌이는 불확실한 투쟁이고, 악을 물리치고 얻은 승리는 걱정과 분투로 가득하며 불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유혹 가운데서 신의 말씀은 그것을 간략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인간의 삶은 유혹이 아닌가?』

그러나 교만한 자는 살면서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자는 위대한 것이 아니라 허영으로 부푼 것이며, 겸손한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당연히 거부당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이렇게 인간의 의로움이 구성된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육신을 영혼에 바치며, 그의 악이 반항하더라도 악을 물리치거나 적어도 저항하는 이성을 따르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기 의무를 다하고 죄를 사하여 줄 것을 간청하며, 자신이 받은 모든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의인이 언급하는 최후의 평화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본성은 견고한 불멸성과 썩지 않음을 누릴 것이며, 더는 악이 없고 자신이나 타인에게서 어떠한 저항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악을 이성이 다스릴 필요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고 영혼이 육신을 다스리며 속박이 끝난 삶의 행복에 걸맞은 아름다움과 기능을 주신다. 이러한 상태는 영원할 것이며, 우리는 그 영원함을 보장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축복의 평화와 이 평화의 축복은 최고의 선이 될 것이다.

28장: 악인의 종말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도성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으로도 부르는 영원한 고통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될 것이므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고, 육체는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두 번째 죽음이 더 가혹할 것이다. 어떤 죽음도 그것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 죽음과 삶이 반대이듯이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며, 의인의 마지막으로 선언된 평화에 대립하는 악인의 마지막엔 어떤 전쟁을 발견할 수 있는지 묻는 것에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전쟁에서 해롭고 파괴적인 것이 무엇인지 관찰한다면, 그것이 상황에 대한 상호 대립과 갈등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의지와 욕정의 대립, 욕정과 의지의 대립, 둘 중 어느 한쪽이 승리하더라도 그 대립은 절대 끝날 수 없고, 그리고 고통의 격렬함이 육체의 본성과 대립하면서 서로에게 굴하지 않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쓰라린 전쟁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생에서 이러한 갈등이 일어났을 때, 고통이 이겨서 죽음이 그 느낌을 없애거나 본성이 이겨서 건강이 고통을 쫓아버릴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세상에서 고통이 계속되며 괴롭힐 것이고, 본성은 그것을 의식하며 견딜 것이다. 그것은 소멸하지 않으며 처벌도 사라져선 안 된다. 이제 최후의 심판을 통해 사람들은 선은 최고의 선을, 악은 최고의 악을 마지막에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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