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의 책 『고독 속의 명상』을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 속에서 어떻게 기대 없이 솔직할 수 있고 그때 진실로 신을 찾는다는 통찰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2부. 고독에 대한 사랑 7장 침묵에 의해 자유로워질 때 더는 삶을 요리조리 재지 않고 실제로 살아갈 때 산만해지지 않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온 삶이 기도가 됩니다. 침묵이 기도로 가득 차게 됩니다. 침묵의 세계가 기도를 도와줍니다. 고독 안에서 활동하는 가난이 이루어놓은 일치는 영혼의 모든 상처를 끌어 모아 꿰맵니다.
우리가 가난한 상태로 남는 한,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한 산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가난이 우리가 산만해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나의 가난이 영적 부를 위한 은밀한 욕망이라고 합시다. 나 자신을 비우고 침묵하는 척하면서, 실제로 하느님께 어떤 체험으로 나를 풍요롭게 해주시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모든 것이 우리를 산만하게 만듭니다.
모든 창조된 것이 특별한 체험을 찾는 나의 탐색을 방해하니 그것들을 차단해야 합니다. 아니면 나를 찢을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나 자신이 방해가 됩니다. 하지만 가장 불행한 것은, 나의 기도가 나 자신에 집중되어 있다면 기도가 나 자신의 풍요로움만 추구한다면 기도 자체가 나를 산만하게 할 수 있지요. 자신의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지식의 열매를 먹고, 나 자신과 하느님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갑니다. 나는 혼자 남겨졌고 무엇도 나의 욕망을 멈출 수 없지요.
내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나를 산만하게 만듭니다. 내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기도로 변하는 침묵과 가난과 고독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때 하늘, 새, 나무들 바람도 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정말로 가난해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무엇에나 자족해야 합니다. 참된 가난은 누구에게나 특히, 하느님에게서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거짓된 가난은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가난입니다. 참된 가난은 감사를 주고받는 것, 우리가 쓸 필요가 있는 것만을 지니는 것입니다. 거짓된 가난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척하고 청하지 않는 척하면서 모든 것을 구하려 애쓰면서 전혀 감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8장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성경, 마태복음 24: 26~27
그리스도는 시간의 끝에 뜻밖에 오실 분이시며, 주님이 오시는 순간을 아무도 짐작할 수 없고 매 순간 주님에 속한 사람들에게 오시며 그들도 주님의 오심을 보거나 짐작할 수 없지요. 하지만 주님이 계신 곳에 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독수리처럼 본능적으로 모여들고,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매 순간 주님을 찾습니다. 세상의 종말에 언제 어디서 주님이 나타나실지, 확실히 말할 수 없듯이 언제 어디서 주님이 명상하는 영혼들에 자신을 드러내실지도 말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찾던 많은 이가 있지만 주님을 찾지 못했고, 은둔 속에서 주님과 함께 숨으려 했던 많은 이가 있지만 주님 자신이 그들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을 잡는 것은 번개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번개처럼 원하는 곳에 내려치십니다.
참으로 명상하는 모든 영혼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광야에 그들 무리만 모여 있지도 않고 은둔에 자신을 가두지도 않지만 주님이 계신 곳에 그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찾을까요? 기술일까요? 주님을 찾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은 주님의 뜻에 따라 찾습니다. 주님의 뜻이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외적인 삶을 정리해 주시며 주님을 찾을 수 있는 정확한 장소로 그들을 데려갑니다. 심지어 거기서도 그들은 어떻게 도착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과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자마자 시골, 사원, 숲 속, 도시 등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하느님과 단둘이 있게 됩니다.
번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번쩍이면서 지평선 전체를 비추고 원하는 곳에 내려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가 그 사람의 영혼 깊숙이 번쩍이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여정 중에 있는 것 같지만 이미 끝에 도착했음을 알게 됩니다. 지상에서 은총의 삶은 영광된 삶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간 여행자이지만 잠시 그리고 영원히 자기 눈을 떴습니다.
9장 무한하신 하느님 안에 살며 그 무한함에 기뻐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좁은 공간 속으로 하느님의 무한성을 밀어 넣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고 더 나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이 나보다 무한히 더 위대하심을 알기에 그분이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분을 알 수 없지만 그걸 알고 만족하면 평화를 얻고 그분이 내 가까이 계시고 그분 안에서 쉽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 그분을 알고 누리기를 원하면, 월권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나 자신을 모독하고, 그분이 자신의 길을 가셨음을 알고 슬픔과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 모든 침묵의 순간이 다 같지만, 참된 기도 안에서는 매 순간이 새로운 침묵의 발견이며 매 순간이 영원으로 통합니다. 그 영원 안에서 만물이 항상 새롭기만 합니다. 지금 여기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심오한 실재를 새로이 발견하여 알게 됩니다. 그 실재의 깊은 곳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빛, 진리 지혜, 평화를 받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 영혼 안에 비추어진 그분 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