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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주가 승인하고 신께서 권능을 부여한 부처는 무수한 영혼을 구할 수 있다. 부처, 위대한 스승은 단순한 칭호가 아니다, 10부 중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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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부처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워요.‍ 부처님이 아직‍ 성불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 세상에 내려와서‍ 다른 중생들과 인연을‍ 맺어야 하는 거죠.‍ 부처로 다시 내려와 충분한‍ 힘을 갖췄을 때 그들을‍ 해탈시킬 수 있도록요.‍ 그래서 몇몇 스승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열반에서 지구로‍ 다시 내려왔다가‍ 다시 열반으로 돌아가죠.‍ 이루 말할 수 없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고요. 허나‍ 아무도 못 봐요. 별로 못 보죠.‍ 여러분이 무엇을 보든, 스승이나 부처가‍ 고통받는 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여러분이 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요. 대부분의 일은‍ 영적인 영역, 내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외적으론‍ 거의 나타나지 않거든요.‍ 우리는 부처님의 고통에‍ 대해 많이 듣지 못했죠.‍ 일부만 들었을 뿐이에요.‍ 제자들의 업장 때문에‍ 석 달 동안‍ 말 먹이를 드셔야 했고, 제자였던 데바닷타때문에 발가락을 다치게‍ 되셨다는 등 말입니다.‍

아, 스승에게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일부 스승들은 제자를‍ 많이 받지 않았는데, 이런 불충이‍ 스승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죠.‍ 육조 혜능도‍ 그의 스승으로부터‍ 가사(승복)와 발우를‍ 받았을 때‍ 도망쳐야만 했어요.‍ 같은 스승, 5대 조사의‍ 다른 제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뒤쫓았기 때문이죠.‍ 후계자임을 상징하는‍ 스승의 가사, 승복을‍ 빼앗기 위해서요.‍ 그래서 5대 조사가‍ 그 이후에 육조 혜능에게‍ 이렇게 말한 겁니다.‍ 『후계자의 가사와 발우, 즉 후계자의 상징을‍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지 말거라.‍ 같은 아쉬람 내에서, 심지어 같은 스승의‍ 계통 안에서‍ 살인이 날 수도 있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승려의 겉옷이자‍ 계승의 상징인 가사는, 그전에는‍ 깨달음을 향한‍ 거룩한 길, 연민과 자비, 평화,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아름다운‍ 언어의 상징이었죠.‍ 그런데도 그들은‍ 스승의 지시를 존중하고‍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혜능을 쫓아가서 죽이고‍ 싶어 했어요. 대체 무슨‍ 출가승들이 그렇죠?‍ 상상이 되나요?‍ 모든 체제에서, 모든 생애에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끼리도‍ 이런 전쟁을 벌입니다.‍ 심지어 같은 교회, 같은 사원, 같은 교단, 같은 나라 등등,‍ 어디서든요.‍ 항상 그런 전쟁을 벌이죠.‍ 하지만 승복이 후계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죠.‍ 왜냐하면 스승이‍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면, 누가 그 후계자의 가사를‍ 차지하든, 그들은‍ 아무것도 될 수 없으니까요.‍

데바닷타처럼요.‍ 그에겐 몇 백 명, 대략‍ 2백 명 정도의 추종자가‍ 있었을 겁니다. 이들은‍ 부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나 봐요.‍ 그래서 부처님을 따르지‍ 않았던 거죠.‍ 아니면 그들의 업장이‍ 너무 무거워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을 겁니다.‍ 부처님은 그냥 승복을 입고‍ 계셨고 외양은 데바닷타와‍ 비슷했어요. 오히려‍ 승려들의 계율 면에선‍ 데바닷타가 더 엄격했죠.‍ 그는 단지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했거든요.‍ 단체 내에서 금욕주의가‍ 더 만연하게 했죠.‍ 사람들이 『이 사람이‍ 더 거룩하고 엄격하구나.‍ 부처님은 아직 이것저것을‍ 신경 쓰시는데 말이야』라고 생각하도록요.‍

부처님은 전혀 집착이‍ 없으셨어요! 이미 부와‍ 사치와 미래의 왕국을‍ 버렸는데 무엇을‍ 더 신경 쓰시겠어요?‍ 부처님이 뭐 하러 여전히‍ 그것을 원하시겠어요?‍ 설사 원했다고 해도, 왕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분의 아버지가 모든 걸‍ 내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가끔‍ 아버지를 찾아가서‍ 가르침만을 주셨죠.‍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식의 도리를‍ 지키셨죠.‍ 얼마나 겸손하셨나요.‍ 하지만 그들은 내면의‍ 거룩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외면만 살폈어요.‍ 그게 이유이죠.‍ 같은 스승에게 간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니죠. 일부는 심지어‍ 여전히 악마 수준입니다.‍ 그들은 그러려고‍ 왔으니까요. 오직‍ 스승에게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서요.‍ 데바닷타나, 주 예수님 시대의 유다처럼요.‍

좋은 승려와 사제, 거룩한 승려나‍ 거룩한 스승들은‍ 더 많은 비방과 굴욕과‍ 미움을 받으며‍ 더 큰 위험에 처하죠.‍ 왜냐하면 나쁜 승려와 나쁜 사제들은 이 스승이‍ 자신들의 신자들을 빼앗아 가서 자신들이 먹을 게‍ 없어지고 그들에게 와서‍ 공양하는 이가 없을까 봐‍ 걱정하기 때문이죠.‍ 사실 걱정할 건 없어요.‍ 이 세상에는 항상 나쁜‍ 승려들을 따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혹은 이들 남녀 승려들이나‍ 사제들이 악의 화신이기에‍ 그들처럼 악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은 어차피 그들을 따를 겁니다.‍

『「충격적인 뉴스에서」 발췌: 네?!? 사람들은 머리에 똥을 싸고,‍ 머리에 똥을 싸고,‍ 머리에 똥을 싸고,‍ 머리에 똥을 싸고,‍ 신자 머리에 똥을 싸고,‍ 비구, 비구니들의‍ 머리에 똥을 싸고,‍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들에게 똥을 쌉니다』‍

수도승이나 성직자라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건‍ 늘 주어질 거예요.‍ 다만 더 특별한 것들, 부유하거나 사치스러운 걸‍ 요구해서는 안되겠죠.‍ 그러면 늘 살아남을 겁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죠.‍ 정글이나 깊은 산에‍ 얼마나 많은 출가자들이‍ 살고 있나요? 그들은‍ 밤낮으로 수행하는 데‍ 여전히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나쁜 승려나 사제, 다른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악마에 홀려서‍ 더 이상 진실을 알 수 없는‍ 것일 수 있어요. 그래서‍ 늘 다른 이들을 도발하여‍ 싸움을 일으키죠.‍ 그들은 그런 걸 좋아해요.‍ 악마의 영향을 받아 이런‍ 공격성을 갖게 됐거나‍ 원래 그들 자신의 성격이‍ 그런 거겠죠. 좀 더 조용한‍ 이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유명하고 성스러운‍ 승려와 스승들을 싫어해요.‍ 자신들이 초라해지니까요.‍

스승들이 그들에게 가서‍ 싸움을 걸거나‍ 뭔가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자들은‍ 멀리서나 뒤에서 몰래‍ 스승을 비방하거나‍ 스승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요.‍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니까요.‍ 거룩한 스승들과 선한‍ 승려들 때문에 자신들이‍ 나쁘다는 게 확연히‍ 드러날까 걱정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이 이 거룩한‍ 승려들을 두려워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을 미워하면서‍ 그들을 없애고 망가뜨리기‍ 위해 온갖 짓을 벌이고, 깨달음과 해탈을 위해‍ 진짜 스승을 찾으려는‍ 신실한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거예요.‍ 그런 겁니다.‍

따라서 유명하고‍ 성스럽다고 해서 가짜‍ 스승이나 나쁜 승려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어요.‍ 신의 은총으로 다른 이들이‍ 고양되고 해탈해서‍ 진정한 왕국,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가도록‍ 돕기 위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면 돼요.‍ 그게 답니다.‍

주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알고 계셨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세상으로 내려가‍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셨죠.‍ 그 덕에 그분의 생애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거죠. 그리고‍ 그분의 영향력과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죠.‍ 수십억의 사람들이‍ 주 예수님을 따르고 있어요.‍ 비록 진정으로 신실하지는‍ 않더라도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이 옳다는 걸‍ 알고 있죠. 그 가르침을 따를‍ 정도로 강하지는 못해도요.‍ 부처님도 마찬가지예요.‍ 부처님이 더 이상‍ 육신의 몸으로‍ 이곳에 계시지 않더라도, 수십억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어요.‍ 최소한 노력은 하죠.‍ 일부는 그 가르침에 따라‍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거나 성인이 되기도 하고‍ 적어도 훌륭한 승려나‍ 신자가 되기도 하죠.‍ 그러니 상관없어요.‍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게 너무 위험해요.‍ 특히 유명하고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더욱‍ 그렇죠. 그렇다면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한다고 해도 안전할지는‍ 미지수이죠. 질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명성이나 이익에 타격을 입을 위협을‍ 느낀다면 그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 여러분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죠.‍

많은 스승들이 죽었어요.‍ 뭣 때문에요? 그들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죠. 사회를‍ 더 청정하고 순수한 곳으로‍ 만들고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려고 남들을 도왔을‍ 뿐이지만 어쨌든 죽었죠.‍ 심지어 이 세상 작은 구석, 어울락(베트남)에서도, 최근에, 두세 분의‍ 스승이 사라졌어요.‍ 내가 기억하는 분들은‍ 후인푸소 스승과‍ 민당꽝 스승이에요.‍ 두 분 다 성스러운 분들로‍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항상‍ 사심 없이 희생했으며,‍ 부처님을 따라 해야 할 일을‍ 하시려고 애썼죠.‍ 사람들이 이 두 성인을‍ 성인이나 불보살로‍ 믿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그들이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은 건 알 수 있어요.‍ 잘못된 일을 하지 않았죠.‍ 오로지 좋은 일만 했어요.‍ 하지만 어딘가에 비밀을‍ 누설하는 분자들이 있었고‍ 누군가 몰래 잠입해서‍ 그들을 죽였어요. 그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죠.‍ 아무도 그들을 못 찾았어요.‍ 다들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남꾸억팟‍ 또는 남꾸억 불교, 코코넛 불교의 창시자인‍ 응우옌탄남 스승도 있어요.‍ 그분 또한 살해되었죠.‍ 아무 이유 없이요.‍ 정말 그분이 살해될 만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분은 그저 자국민을 위해‍ 평화를 구하셨을 뿐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불필요하고‍ 잔인하게 죽어가는 걸 보고‍ 고통스러워했을 뿐이죠.‍ 그러니 이 세 분의 스승이‍ 응우옌탄남 스승처럼‍ 은밀하게 살해되거나‍ 아니면 일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해된‍ 이유를 알 겁니다.‍

『「코코넛 스님~독특한 출가수행자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발췌 - 코코넛 스님의 모험적인 삶: 코코넛 스님께서‍ 미국 대통령에게 코코넛을‍ 선물했는데 가까이 보면‍ 코코넛에 평화의 상징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코코넛 스님이‍ 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청원이었습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20대의 대형 수송기를‍ 빌리고자 하셨죠.‍ 거기에 물자들을 싣고‍ 스님과 스님의 제자들이‍ 당시 베트남을‍ 적대적인 양측으로 나눈‍ 17도선의 비무장지대로‍ 가고자 하신 겁니다.‍ 그들은 거기‍ 벤하이강 한가운데‍ 기도소를 세우고‍ 스님이 그곳에 앉아‍ 7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를 하실 계획이며‍ 강 양측에서는‍ 각 3백 명의 승려들이‍ 함께 기도하겠다고 했죠.‍ 스님은 존슨 대통령에게‍ 이 계획이 베트남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하셨습니다.‍ 이 편지가 존슨 대통령에게‍ 전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코코넛 스님이 베트남의‍ 평화를 위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습니다.‍

로 신문에 따르면‍ 1975년 이후‍ 정부는‍ 스님의 종교 수행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스님은‍ 망명을 시도하셨지만‍ 체포되셨습니다.‍ 1985년이 돼서야‍ 스님은 출소하셨는데‍ 당시 스님의 몸무게는‍ 40㎏도 안 되셨습니다.‍ 1990년 5월,‍ 제자들이 비밀리에‍ 띠엔장 지방의‍ 한 신도의 집으로‍ 스님을 모셨으나 경찰이‍ 그곳까지 찾으러 왔죠.‍ 양측 사이에‍ 어떤 대치가 있었는지‍ 명확하진 않지만‍ 그날 코코넛 스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살인사건 이후‍ 벤쩨 지방 인민법원이‍ 스님의 제자들을‍ 공무집행 방해죄로 기소해‍ 높은 형량을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의 세부사항과‍ 코코넛 스님의‍ 사망 사건은‍ 국영 언론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존 스타인벡은 회고록에서‍ 「코코넛 스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우린 작별하지 않았다.‍ 그 순간 좀처럼 그런 일이‍ 없으셨던 스님이 눈물을‍ 훔치셨다. 하지만‍ 곧 다시 미소 지으시며‍ 손을 높이 들어‍ 그분이 사는 하늘을‍ 가리키셨다」고 썼습니다』‍

이는 선한 일을 하거나‍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거나‍ 참되고 성스럽고 고귀한‍ 가르침으로 영혼을‍ 해탈시키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두렵게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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