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거기에 익숙하죠. 난 여러분이 달라고 하니 주는 것뿐이에요. 한데 여러분의 이런 행동은 문제를 자초하는 거예요. 이해하겠어요? 내 비건 과자를 아래층에 가져가서 윙크를 하고 그렇게 살랑거리며 나눠준다면 누가 넋을 잃지 않겠어요? 그들은 살아있는 부처이지, 나무 조각상이 아니니 당연히 심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죠. 나무 불상은 나무 심장을 갖고 있어 고통을 못 느끼겠지만요. 허나 이들은 진짜 부처이죠. 그래서 내가 나서서 모든 걸 풀어야 했어요. 허나 그걸 풀다 보니 어떤 사람은 상처받았고, 어떤 사람은 병이 났죠. 마치 가시덤불에 걸렸을 때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다 보면 필연적으로 상처가 나는 것과 같아요. (네) 살점이 까지고 피부가 벗겨질 거예요. 그런 뒤 크게 울부짖겠죠. 결과가 어떨지 알 거예요. 그런 행동을 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남녀가 서로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죠? 『반은 내가 먹을 테니 나머지 반은 당신이 먹어요』 오, 세상에! 어찌 그리 낭만적이죠? 그럼 당연히 그런 분위기를 풍기겠죠. 모두 순진한 척 하지 말아요. (네) 그런 사랑을 나눠주면 상대는 미쳐버리겠죠. 본인은 괜찮을지 몰라도 상대는 미쳐버릴 거예요. 갖고 놀 게 필요하다면 다른 걸 찾아봐요. 스승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말아요. 허나 높은 세계의 불보살이 사랑을 베풀 땐 다르죠. 그 사랑을 받으면 가볍고 편안해요. 넋이 나간 사람마냥 멍한 것과는 다르죠. 눈은 반쯤 감긴 채 뜰 수도 없게 되잖아요. 하루 종일 멍하게 꿈을 꾸는 듯한 상태로 어딜 가든 그녀 이름만 계속 부르죠. 그 사람 이름을 쉬지 않고 계속 부르다가 결국엔 완전히 상사병에 걸리고 제정신이 아니게 되죠.
하지만 우리가 불보살을 사랑하거나 그분들이 우릴 사랑할 땐 다른 기분이 들 거예요. 홀가분하고 집착이 없죠. 그분들이 그립긴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볍고 완전히 좋은 상태죠. 하지만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되면 『영혼이 시들어 가는』 기분이 들 거예요. 『넋이 반은 나갔다』고 하죠. 넋이 나갔으면 찾아오세요. 불보살들이 우리를 사랑할 때는 잃는 게 전혀 없어요. 점점 더 많아지고 풍성해질 뿐이죠. 계속 커져만 가죠. 영혼은 활력으로 채워지고 우리의 지혜는 점점 더 확장될 거예요. 마음 속 자비가 날로 커지고 깊어져서 불보살의 자비심처럼 될 거예요. 그게 진정한 사랑이죠. (네) 그런 사랑을 알게 되면 세속의 사랑은 사소하게 느껴지죠. 우린 이따금 따분해지면 호기심에 재미 삼아 뭔가를 하지만… 그것도 좀 지나면 질리게 되죠. 그렇죠?
그래서 그 옛날,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이 남편이나 아내를 떠나 부처님을 따른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아내나 남편을 유혹한다고 부처님을 미워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유혹한 게 아니었죠. 이미 부처가 됐고 자유자재하게 됐는데 왜 피곤하게 또 다른 짐을 지겠어요? 5백 명, 5천 명이나 되는 후궁들을 다 두고 떠나오셨는데요. 그 매력 없는 여자를 누가 유혹하겠어요? 치아도 없는 사람을요! 노인들까지 집을 떠나 부처님을 따랐죠. 그때는 치아가 빠지면 그걸로 끝이었어요. 의치를 해 넣을 수도 없었죠. 요즘에야 치과에서 임플란트를 하지만요. (네) 옛날에는 치아가 빠지면 그걸로 영영 끝이었어요.
옛날 왕궁에는 후궁들과 미인들이 있었다는 걸 알죠? 그들은 30대나 40대가 되면 벌써 자리에서 물러나고 은퇴를 했어요. 그럼 왕은 새로운 후궁들을 간택했죠. 치아 있는 젊은 처자들로요! 그때는 사는 게 지금 같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처럼 음식이 풍성하지도 않았고, 영양가가 있지도 않았죠. 또 예를 들어, 병이 나면 지금과 달리 치료약이 매우 귀했어요. 또한 많은 제약도 있었죠. 가령 왕궁 내에서는 이런저런 걸 금했어요. 내의원이 왕실의 여인을 치료할 때는 얼굴을 봐선 안 됐고 손만 봐야 했어요. 어떨 땐 손도 직접 못 만지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죠. 나무 조각을 사용해 맥을 짚거나… 어떻게 그런 걸로 병을 제대로 진단했겠어요? 때로는 환자 손목에 실을 묶은 다음 내의원이 커튼 밖으로 실을 잡아당겼죠. 커튼 밖에서 실을 당기는 식으로 어떻게 제대로 치료를 했겠어요? 또 어떻게 맥을 제대로 짚고 환자 상태를 제대로 알았겠어요?
그런 게 많았어요. 당시 왕궁에는 엄한 규정이 많았으니까요. 이를 테면, 누구도 왕비의 몸을 만질 수 없었죠. 만일 누가 그렇게 한다면, 그 집안은 삼대를 멸했어요. 세상에! 피부에 좀 닿았다고 삼대를 멸한 거예요. 너무 극단적이죠. 예를 들면 그랬어요. 가령 예전에 태국에서는 누구도 왕비의 몸에 손을 대선 안 됐어요. 만지는 경우, 처형이 됐죠. 그런 왕비가 있었는데, 라마5세 국왕의 왕비였죠. 임신한 몸으로 타던 배가 뒤집혔는데 결국 물에 빠져 죽었죠. 아무도 감히 구하려 들지 않았거든요. 정말 비극적이죠. 때로는 법이란 게 맹목적일 수 있어요. 당시 아무도 그녀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죠. 구하려고 했다가는 삼대가 죽을 테니까요. 그러니 누가 나서겠어요? 그냥 비통하게 서서 눈 감고 통곡만 했죠. 다들 왕비를 존경했지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죠. 국왕도 왕비를 무척 사랑했고요. 국왕은 통곡을 했어요. 자기가 만든 법이었죠. 허나 법은 법일 뿐… 그 법은 왕비에게 지분거리거나 추파를 던지는 등 부적절한 행위를 하면서 무례하게 굴어선 안 된단 걸 알려주기 위한 거였어요. 생사가 달린 상황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그 순간엔 그저 인간 대 인간일 뿐 왕비와 백성이 아니니까요. 허나 사람들은 두려워했죠. 융통성 없는 법이 된 거죠.
솔직히, 모든 나라가 그런 식이죠. 법은 나쁜 사람들 때문에 제정된 거예요. 나쁜 의도를 지닌 이들을 제약하려고요. 선한 의도를 가진 선한 이들은 옳은 일을 해야 되죠.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해요. 법을 따지지 말고요. 예를 들면 그래요. 강가를 걷던 두 승려처럼요. 물에 빠진 여인을 보면 구해야 하죠. (네) 『출가자는 여자를 만지면 안 된다』면서 그냥 보고 있어선 안 되죠. 여인이 죽게 내버려둔다면 그런 게 무슨 자비심이죠? (네) 예를 들면요. 물에 빠진 여인을 건져 줬다고 부처님이나 하늘이 벌하겠어요? (맞습니다) 오히려 안 구하면 하늘과 부처님께서 벌하실 거예요. 자비심이 없으니까요. 인명보다 자신의 평판을 더 중시한 거죠. 소위 외적인 순결함을 더 중시한 거예요. 누군가 병을 앓거나 고통으로 죽어 가는데 생각할 게 뭐 있나요? 자기가 무슨 피해라도 입을까 걱정해야 하나요? 안 그래요? (맞습니다) 설사 지옥에 간다고 해도 그들을 구해야 해요. 예를 들면 그래요.
불보살의 무한한 사랑, 고귀한 사랑은 그래요. 불보살의 제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에서 나온 행위를 해야 해요. 사랑으로 행동한다는 게, 자식이 못되게 굴고 훔치거나 누굴 때릴 때 야단칠 수 없다는 건 아니죠. 훈육을 해야 돼요. 알겠어요? 알게 해줘야 해요. 『네가 한 짓은 안 좋아. 지금부터 그런 짓을 안 하면 엄마가 용돈을 주마. 엄마는 널 사랑해』 어떨 때는 새옷을 사주고요. 『하지만 나쁘게 행동하면 침대 다리에 묶어둘 거야』 예를 들면요.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해요. 『엄마가 벌주려고 이러는 게 아니란다. 자, 벌을 받겠니, 아니면 예쁜 옷을 얻겠니?』 예를 들면요. 착한 일을 하면 보상해주고, 잘못을 하면 벌을 주는 거죠. 그럼 아이들은 이해하고 좋은 사람으로 자랄 거예요. 좋든 나쁘든 똑같이 반응하면, 그 차이를 어찌 알겠어요? 아이들은 어릴 때 가르쳐야 해요. 사랑은 그런 양면이 있어요. 엄격한 면과 관대한 면이 있죠. 무조건 관대하면 안 돼요. 버릇을 잘못 들이면 나쁜 아이가 될 테니까요.
칭하이 여사가 사방으로 사랑을 퍼뜨리라고 했다고 아이들이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둬선 안 돼요. 종일 가부좌만 틀고 앉아서 자기 아이가 이웃집 아이를 때리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도 그냥 놔둔다면, 못되게 성장할 거예요. (네) 버릇이 없으니 훨씬 더 나쁜 사람이 되겠죠. 도둑이 되거나 살인자가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감옥에 갈 텐데 부모 마음이 기쁘겠어요? 그게 진정한 사랑일까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걸까요? 아, 그건 가짜 사랑이죠. 그렇죠? (네) 그러니 사랑한다는 게 늘 오냐오냐 받아주는 것만은 아니에요. 상황을 살펴야 해요. 물론 이웃 아이에 대해선 어쩌지 못하겠지만, 자기 자식은 잘 보살펴야 해요. (네)
가령, 외부인들에게 스승은 다정하고 공손하죠. 그들은 나의 『자식들』이 아니니까요. 그들 행위는 내 알 바 아니죠. 그들 걱정까지 할 시간은 없으니까요. 그들은 이따금 와서 날 볼 뿐이잖아요. 내가 한 번 가르친다고 그걸로 다 되는 건 아니죠. (네) 내가 가르친다고 해도 귀담아들을 지 알 수 없고요. 내게 와서 가르쳐 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내게 와서 청한다면 제대로 가르칠 테지만요. 그런 때가 됐을 때 울고불고하지 말아요. 난 예의를 차리며 그런 걸 봐주진 않을 거예요. 누가 잘못을 하면 바로 지적할 거예요. 그게 내 책임이니까요. 그렇게 해달라고 내게 부탁한 거잖아요? (네) 날 스승으로 존중하며 제대로 가르쳐주길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혹 제대로 안 가르치면 날 탓할 테고요. 그러니 난 책임을 다해야 해요. 그렇죠? (네) 아, 그건 달라요. 이렇게 말하면 안 되죠. 『아, 세상에! 외부인들을 대하실 땐 왜 저리도 다정하실까? 나한테는 혹독하고 모질게 하시던데, 난 여기 와서 비건식을 하고 이렇게 그냥 바닥에서 자는데, 칭찬도 안 해주셔』
자녀를 사랑 안 하면, 자녀의 인생이 망가질까 봐 염려하지도 않을 거예요. 자녀를 제대로 안 가르쳐서 그들이 나쁜 길로 빠진다면, 나중에 사람들한테 맞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요. 그땐 그냥 울부짖기나 하겠죠. 늙은 대나무가 어린 죽순 때문에 운다고 하죠. 그러니 자녀를 돌봐야 해요. 그들을 사랑하니까요. 자녀들이 평온하고, 근사하고, 고귀한 삶을 누리길 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원칙과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죠. 실수를 하면 야단치고 바로잡아서 옳지 않은 행동이란 걸 알게 해야 해요. 『그런 짓을 하면 이런 벌을 받게 될 거야. 그래야 명심하고 다신 그런 짓 안 하지』 예를 들면 그래요. 해를 주려거나 큰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니죠. 그런 행위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분명히 알게 해주는 거예요. 나쁜 행동을 하면 기둥에 묶는 등 벌을 주는 거죠. 이건 그저 한 예죠. 훌륭한 행동을 하면 좋은 옷을 사주고, 사랑과 애정을 담아 엄마가 껴안아주고요. 용돈을 주거나 새 간식을 주기도 하고요. 뭐가 좋은 일인지 알려줘요.
동물주민을 훈련할 때와 같은 거죠. 개주민이 사람을, 범인들을 추적하는 훈련을 할 때 같은 방식으로 훈련하죠. 개주민이 대상자의 소지품을 발견하면 보상을 해주잖아요. 제대로 못 하면 먹을 걸 안 주고 다시 반복하게 하죠. 그런 식으로 가르치죠. 그럼 다음엔 알죠. 잘하면 먹이나 보상, 칭찬이 주어지지만, 제대로 못 하거나 말을 안 들으면, 벌을 받거나 굶게 될 수 있다는 걸요. 예를 들면요. 아이들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는 걸 알려주세요. 『보상이 없는 게 아니란다. 네 길을 선택해야 돼』 이런저런 행동을 하고 잘못하게 된다면요. 미리 말해두세요. 그런 행동은 안 된다고요. 물건을 훔치거나 욕하는 건 안 된다고요. 노인들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안 되고요. 『그럼 결과를 감내해야 돼. 너하기 나름이란다. 그렇게 하겠다면 그 결과도 받아들여야 할 거야』 일요일에 외출을 금하고, 집에서 공부하고, 숙제하고, 집안일을 하게 하는 거죠.
나쁜 행동에는 괴로운 결과가 따른단 걸 알게 해야 해요. 좋은 일을 하면 기쁨과 성취감, 명예가 함께한단 걸 알려주고요. 그럼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질 거예요. 과하게 체벌을 가하거나 굶기라는 게 아니에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해요. 어린 나이에는 아주 빨리 배우잖아요. 과하게 체벌할 필요는 없어요. 상황에 따라 다르죠. 너무 심하게 벌하면 오히려 아이들은 무너질 테고, 그건 좋지 않아요. 사랑을 느끼게 해줘야 해요. 애정을 주지 않으면서 벌만 가해서는 안 돼요. 그럼 효과가 없죠. 자칫 자기를 미워한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작은 행위라도 좋은 일을 하면 바로 보상을 해주고 격려를 해주세요.
사랑은 『뭘 하든 놔두는 것』이 아니에요. 가령 주 예수님과 부처님은 모두에게 사랑을 전파하시죠. 허나 제자들이 실수를 하면 평소처럼 꾸짖으시죠. 그렇죠? 그래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못질을 한 자들을 원망하지 않으셨어요. 그럴 필요가 없죠.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으니까요. 가시밭길, 불순한 길을 가기로 선택한 것이죠. 그들은 아직 천국이나 부처님에 의해 영적으로 바뀔 때가 안 됐고 그래서 그 길을 택한 거예요. 십자가형을 이행하도록 명령받은 병사들과 같아요. 그들은 그래야만 했죠. 잔인하게 굴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죠. 예를 들면요. 그래서 그리스도나 부처님은 그런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으셨어요. 그들은 그분들을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분들의 가르침을 청하러 오지 않았죠. 허나 제자들한테는 스승이 보통 엄격하죠. 그런 법이에요. 예전에 부처님은 아들 라훌라도 꾸짖었어요. 이러면서요. 『공부를 게을리하고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발을 씻는 대야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먹는 진미나 귀한 음식을 담는 데 쓰이지 못한다. 식탁에 오르는 대신 땅바닥에, 더러운 곳에 놓여서 발 씻는 데 쓰일 것이다』
그렇게 비유를 한 이유는, 옛날엔 그런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엔 사람들이 신발을 안 신었어요. 알겠어요? 부유한 이들만 신발을 신었어요. 영적 수행을 하는 이들은 대개 맨발로 걸어 다니며 고행했어요. 영적 수행자들에게는 원칙이 있었는데, 출가하면 맨발로 걷는 거였죠. 그게 더 간단했죠. 어디를 갈 때마다 신발을 사야 한다면, 신발 살 돈은 어디서 마련하겠어요? 당시 신발은 대개 가죽으로 만들었어요. 수행자들 대부분은 가죽 신발을 원치 않았기에, 맨발로 다녔어요. 맨발로 다니다가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문간에… 옛날에 대부분 맨발로 다닌 이유는 신발 살 여력이 없어서예요. 다른 집에 가면 문 밖에 발을 씻는 데 쓰는 대야가 있거나 적어도 물을 담아둔 통이 있었어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마다 거기에 발을 담그죠. 그냥 잠깐만 담가요. 흙모래를 털어낼 정도로만요. 아주 깨끗하진 않아도 돼요. 잠깐 담그는데 아주 깨끗해질 순 없었겠죠? 비누를 써서 박박 문지르며 씻을 때도 완전히 깨끗해지진 않아요. 그건 최소한의 상징적 행위죠. 흙먼지를 다른 사람 집에 들이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사진: 『보호에 늘 감사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