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국 켄터키주의 토머스 머튼 센터와 토머스 머튼 국제 협회에서 이 현명한 신부의 삶과 활동을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이제 토머스 머튼 신부님의 저서 『고독 속의 명상』에 나온 지혜를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이 신비가는 신과 우리 자신을 침묵 속에서, 또 종소리 속에서 찾으라고 말합니다.
16장 “종소리는 하나님만이 선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이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줍니다. 종소리는 우리에게 만물이 사라지고 우리의 선입견이 중요하지 않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우리 근심에 끼어듭니다. 그들은 책임과 일시적인 근심이 잊게 만드는 우리의 자유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우리의 동맹을 알리는 소리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주님의 진정한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요청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복음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 교회 종소리의 축복을 마지막에 읽습니다. 종소리는 말합니다: 사업은 중요하지 않아요. 신 안에서 쉬며 기뻐하세요. 이 세상은 다가올 세상의 그림자이고 약속일 뿐이니, 덧없는 것에 초연한 사람들만 영원한 약속의 본질을 잡을 수 있습니다.
종소리는 말합니다: 우리는 수백 년 동안 대 성당의 탑에서 말했습니다. 그들의 땅에서 성도와 당신 조상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당신을 거룩하게 되도록 불렀지요. 우리가 그들을 부르는 말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선하게 되라. 교회에 와라』하지 않고, 단지 『계명을 지켜라』라고 말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일어나셨다. 우리와 함께 하자. 하나님은 선하시고, 주님의 사랑이 구원을 쉽게 해주셨다』 우리의 이 메시지는 언제나 온 사람과 오지 않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시므로 우리의 노래도 완전하며,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선의를 쏟아붓습니다”
17장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 이름을 지어준 일은 필요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침묵을 공유하는 것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은밀성을 방해하거나 그들에 관한 생각으로 자신의 고독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을 구체화하고 침묵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은 침묵 안에 머물고 침묵도 그들 안에 머물기 때문이죠.
침묵 속에 있는 존재들이 참된 침묵을 만듭니다. 그들의 침묵은 존재와 동화되기 때문이며, 그 존재를 명명하는 것은 그 침묵에 이름 붙이는 것이므로 그것은 존경을 표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축복은 더 존경받을 가치가 있게 만듭니다)
기도는 말을 사용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들을 존중하는 것이며, 마술은 침묵과 존재의 신성함을 깨기 위해 말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침묵 안에서 마치 존재들이 무엇에 홀리고 비열하게 악용되어 하느님에게서 떼어질 수 있는 듯이 존재를 다룹니다. 마술은 주님의 침묵을 침입자의 피난처, 즉 하느님의 왕좌를 찬탈하여 그분의 현존 대신에 자신을 내세우는 악한 세력의 피난처로 삼아 모독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존재하시는 주님을 대신할까요?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분 자리를 찬탈하는 시늉밖에 못 하며, 그리하여 단지 하느님을 더 명확히 긍정할 뿐입니다. 『존재하지 않는』이란 말에서 않는다를 삭제하면 『존재한다』만 남습니다. 신의 침묵 속에서 우리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보며, 존재하시는 주님이 항상 우리 자신과 주님 사이에 끼어들려고 애쓰는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움을 알 때 마술을 극복합니다.
주님의 현존은 나 자신 속에 드러나며, 내가 존재하면 주님도 존재하십니다. 내가 존재함을 깨달으면, 나의 존재와 나의 현재의 실재의 밑바닥까지 자신의 가장 뿌리인 그 정의할 수 없는 존재함까지 꿰뚫는다면, 그 깊이 숨은 중심을 통해 나는 전능하신 분의 이름인 무한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넘어갑니다.
침묵 속에서 자신에 대한 나의 지식은 (자신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나의 진아의 신비함을 통찰함으로써 얻어진 지식으로, 이 진아는 특별하기 때문에 언어와 개념을 초월합니다) 하느님 자신의 진아의 침묵과 『주체성』을 향하여 열립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나는 『접목된 말씀』과 동화되며, 그 말씀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에 동화되면 내밀하고 희미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확실성을 띤 지식과 인식을 얻고, 이러한 확실성은 명상 속에서만 얻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외아들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 때,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는 어둠 가운데 영적 이해의 빛이 비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위대한 신비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경외함을 부르는 놀라운 진리인 하느님께서 자신의 다함 없는 존재의 심연 위에 굽히시어 주님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시어, 우리에게 주님 진리의 빛을 입히시며, 주님 사랑의 불로 우리를 정화하시고, 십자가의 힘으로 그분의 외아들과 우리를 결합하셨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장 26절) 『태양이 있기 전에 그 모태에서 나는 그대를 택하였노라』~ (시편 109장 3절)
오, 만물의 아버지이신 위대하신 하느님, 당신의 무한한 빛은 내게는 어둠이오며, 당신의 광대함은 내게는 공허이옵니다. 당신 자신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은 나를 당신 자신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나는 다만 당신의 다함 없고 영원한 실체의 순간적인 나타남일 뿐입니다. 나는 당신을 알 수 없고, 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당신으로부터 이 허공으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당신께서 외아들의 성심 안으로 나를 끌어당겨 주지 않는다면요.
아버지, 내가 알 수 없는 당신을 사랑하오며, 내가 보지 못하는 당신을 껴안으며, 내가 마음 상하게 해드린 당신께 나를 맡깁니다. 당신께선 내 안의 외아들을 사랑하시니까요. 당신은 내 안의 그분을 보며 내 안의 그분을 껴안습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그 사랑으로 그분은 나와 완전히 일치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에서의 옷을 입은 야곱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공과 귀한 피를 입은 야곱처럼 당신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사랑의 계시인 이 위대한 신비의 어둠 속에 눈이 멀기를 바라신 당신은 손을 내 머리 위로 얹으시며 축복하시고 당신 외아들처럼 나를 축복하소서.
당신은 오직 그분 안에서 나를 보려고 하셨지만, 그렇게 기꺼이 나를 있는 그대로 더 많이 보려고 하셨습니다. 죄 많은 자아는 나의 진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게 원했던 것이 아니고 오직 내가 자신을 위해 원했던 자아입니다. 나는 이제 거짓된 자아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 외아들의 자아로 얻고서 당신께 가렵니다. 그분의 성심이 나를 사로잡고 나의 죄를 부숴버렸습니다. 다름 아닌 그분이 나를 당신께 소개할 것입니다. 소개하는 그곳은 바로 그분의 거룩한 성심입니다. 그곳은 당신의 궁전이며, 천국에서 성인들이 당신을 숭배하는 성전입니다”